“크라이스트처치, 얼마나 아시나요?” – 리틀턴 터널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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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접한 크라이스트처치에는 리틀턴(Lyttelton) 항구가 있어 1850년 12월에 영국을 떠난 캔터베리 협회(Canterbury Association) 이민자들 선박이 이곳에 처음 도착했다.

이들을 포함해 이후 캔터베리로 오는 이민자들은 모두 말과 소, 양을 이끌고 포트 힐스(Port Hills)에 난 브라이들 패스(Bridle Path)를 따라 험준한 고개를 넘은 뒤 지금의 크라이스트처치 시내 일대에 형성된 정착지로 들어왔다.

터널 개통식 공식 안내서에 실린 그림(1964)

  <말이 감기에 걸릴까 중단된 터널 건설 논의>

당시 고개를 넘을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은 작은 배에 실려 뉴브라이턴 남쪽 사우스쇼어(Southshore)와 섬너(Sumner) 해변 사이에 놓인 좁은 해로를 통과해 히스코트(Heathcote) 강 하구까지 운반했다. 이 해로는 수심이 깊지 않고 폭도 좁아 밀물이 들어오고 바람이 적당할 때만 이용할 수 있는 상당히 위험하고 또 이용이 제한된 통로였다.

1851년에 시내에서 바다까지 곧바로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으로 터널 건설을 검토했지만 곧 중단했는데,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주요 운송수단인 말이 수레를 끌고 서늘한 터널을 나오자마자 캔터베리 평원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과 마주치거나 그 반대에 처하면 감기에 쉽게 걸린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브라이들 패스 대신에 큰돈을 들여 리틀턴에서 섬너에 이르는 에반스 패스(Evan’s Pass)를 건설해 1857년 완공해 이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하는 데다 교통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으며, 이후 거버너스 베이(Governor’s Bay)에서 시작하는 다이어스 패스(Dyers Pass)와 훨씬 더 남쪽으로 돌아가는 게비스 패스(Gebbie’s Pass)까지 새로운 통로가 잇달아 2개 더 만들어졌다.

그러나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겨울이면 도로에 내린 서리로 브라이들과 에반스, 그리고 다이어스 패스는 이용할 수 없어 결국 먼 게비스 패스로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철도 터널을 통과하는 첫 번째 기관차(1867)

 <일찌감치 먼저 뚫린 철도 터널>

이런 가운데 1867년에는 리틀턴과 크라이스트처치 시내를 잇는 철도 노선에 길이 2.7km에 달하는 ‘무어하우스(Moorhouse) 터널’이라는 이름의 기차 터널이 등장하면서 물류 수송에 큰 변화가 도래했다.

기차 터널은 영국 기술자들이 도착해 1861년 7월부터 터널 양쪽에서 공사를 시작하고 1867년 말 공사가 완료돼 그해 11월에 첫 번째 기차가 터널을 통과했다.

한편 자동차가 본격 도입되면서 말이나 소를 이용한 물류 이동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이때에도 터널과 운하를 놓고 논쟁하다가 결국 1920년에 ‘Christchurch-Lyttelton Tunnel Road League’가 결성돼 터널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1930년대는 물론 1940년대 이르기까지 오랜동안 최종 결정이 미뤄지며 논의만 무성했으며 그 배경에는 당시 세계 대공황과 함께 필수적인 건설 사업을 제외한 모든 작업을 멈추게 했던 제2차 세계대전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1943년이 되어서야 19개 공공기관이 참여한 터널 건설 추진위원회가 본격 구성됐지만 이때까지도 운하와 터널을 놓고 논란이 계속 일어났으며, 1949년에야 터널과 도로를 건설하는 방안이 그해 6월에 공식적으로 관보에 실렸다.

리틀턴 터널 공사 모습

하지만 이후에도 자금 조달과 통행료 징수, 대출 상환 등 여러 문제가 논의되면서 지지부진한 모습이다가 1961년에서야 공사 입찰에 들어가 7개 회사가 응찰한 결과 국내 회사인 ‘플레처 건설(Fletcher Construction)’과 미국 기업인 ‘카이저 건설(Kaiser Engineers and Constructors)’의 60:40 합작 투자회사에 낙찰됐다.

1961년 9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하루 7.1m씩 굴착하고 일주일 6일간 하루 3교대로 작업이 진행됐으며, 작업 중 터널의 8%에 철골 보강재가 설치됐고 나머지 구간에서는 철망과 암석용 볼트, 그리고 스프레이 콘크리트 살포로만 진행됐다.

1962년 8월에 일단 터널 굴착은 완료됐으며 이후 타일 장착 등 내부 공사를 마친 후 1964년 2월 27일 버나드 퍼거슨(Bernard Fergusson) 총독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식이 열렸다.

개통까지 작업 중 폭약 사고로 2명이 사망했으며 15만 m2의 암석을 캐냈는데, 한편 개통 당시 통행료는 20센트였으며 이는 1978년에 관련 법률이 제정되면서 이듬해 4월 1일부로 개통 15년 만에 통행료 징수는 폐지됐다.

지진으로 철거된 이전 터널 통제소 건물

<지진으로 다시 건축한 터널 통제소>

이 터널은 국도 74호선 중 일부 구간이며 길이는 1,970m로 2017년 7월에 오클랜드 시내의 워터뷰(Waterview) 터널(2,400m)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국내에서 가장 긴 터널이었다.

한편 2010년 9월 캔터베리 지진과 이듬해 2월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발생 당시 터널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히스코트 방면 터널 입구에서 덮개(canopy)가 파손되고 그 옆에 있는 터널 통제소 빌딩 역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결국 1등급 역사적 건물이었던 해당 건물은 폐쇄됐다가 2013년에 철거됐고 터널이 개통된 지 만 50년이 되던 2014년에 그 자리에 새 통제소 건물이 들어섰다.

현재 뉴질랜드 육운국(NZTA)이 관리하는 터널은 하루 1만여 대 이상의 자동차들이 다니고 있으며 터널 내 제한속도는 시속 50km이고 자전거는 통행할 수 없다. [코리아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