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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가게에서 계란을 사려고 하는데, 내 앞에서 계란 한판을 집은 아줌마, 자기 판에 담겨있는 계란을 다른 판의 큰 것과 열심히 바꾸고 있습니다. 나 원 참, 아무리 알뜰하기로 소문난 한국 아줌마라도 이런 짓은 절대로 안 할 터이니, 그러면, 어느 나라 아줌마? 분명 중국 아줌마일거야. 큰 계란만 소복이 골라 담은 그 아줌마, 뒤에 서 있는 제가 같은 동양 사람이라 반가웠는지 한껏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 합니다.

중국 아줌마 : Hello~
나 : Ni mo ha ni ? (니 모하니?, 니 하오마? – 발음도 비슷하군요)
그런데 이 중국아줌마가 저를 보고 대뜸 이렇게 묻는 겁니다.
중국 아줌마 : Are you from 북조선?
나 : (헉! 웬 북 조선?), 앞, 뒤, 옆 돌아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제게 한 말이 분명했습니다.
나 : Did you ask me if I was from 북조선?(나한테 북조선에서 왔냐고 물은 거니?)
중국 아줌마 :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Yes, Are you from 핑양?
나 : 핑양? Oh~ 노우! I’m from 남조선!
(허걱! 웬 남조선??) I’m from South Korea. (내참, 기가 막혀서, 북조선에서 왔냐고?)
그런데 이 중국아줌마, 다른 말은 다 영어로 하는데 북조선, 남조선, 핑양, 한국발음은 아주 정확합니다.

워낙 멋 이랑은 거리가 먼 이 아줌마 스타일. 대충 손질한 머리에 딸 아이 머리핀 하나 푹 꽂고, 그 옛날 남대문 시장에서 사 입은 알록달록 꽃무늬 월남치마(입기 편해 자주 애용하는)에 춥다고 내복은 물론이고 겹겹이 조끼에…. 색이나 잘 맞춰 입던가 색깔도 제 각각이니, 아마도 중국에서 자주 보던 북조선 아줌마랑 비슷해 보였나 봅니다. 살다 보면 동양 사람끼린 척 보면 압니다. 일본 사람인지, 중국 사람인지, 타이완 사람인지.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어데 북조선 아줌마로 보이느냐구요.

허긴, 화장기 없는 얼굴엔 빈티 나는 주근깨도 덕지덕지 붙어 있지, 비쩍 마른 코스모스(?) 몸매도 북한아줌마로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섬나라라서 다른 나라에 비해 유행이 15년은 뒤떨어진다는 뉴지에 와서, 촌년(?) 다 되었다고 한숨 쉬는 아줌마들은 어쩌면 제 말에 이렇게 위안을 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워낙 유행이 뒤진 나라에 살다 보니 내가 요 모양으로 사는 거지. 북한 아줌마 소리 듣고 사는 아줌마도 있는데 말이여.”

아이들 학원 비라도 보태고자 대형마트의 한 시식코너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시식하고 가라고 사람들을 잡아 끌던 중 장보러 온 아줌마들 중에 학교동창이 눈에 띄었습니다. 창피한 마음에 잠시 자리를 뜨며, 혹시나 이런 일을 하는 걸 누군가 알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우울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허름한 용달차 안에서 생선을 팔고 있는 아줌마가 낮이 익어 가만히 보니 옛날 학교 다닐 때, 퀸으로 뽑힐 정도로 미모와 실력이 뛰어났던 동창이었다고 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을 하는 그 아줌마에게 친구는, 창피해하기는 고사하고 남편의 사업실패로 이런 일에 나서게 되었다며 반가워 하더라는군요. 그래, 집으로 돌아오며, 자신의 처지를 그 친구와 비교해 보니 갑자기 행복해지며 위안이 되더라는 겁니다.

사람은 그렇게, 내가 남보다 못한가 싶으면 괜히 기 죽기도 하고, 반대로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나름대로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연락도 잘 안 하던 친구가, 자기 애가 공부 잘해 서울대 들어갔다는 말이 하고 싶어서 겸사겸사 안부전화를 해 오면, 선뜻 축하한다는 말보다는 멀쩡한 배가 갑자기 아파 오고 (무슨 과냐고 물어보기도 싫습니다), 헤드폰 귀에 꼽고 장단 맞추어가며 공부를 하는지, 잠을 자는지 고개 처박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 자식 넘 뒤통수만 째려보게 되는데, 그러나 자식 일 내 맘대로 안 된다며 한숨 들이쉬고 내쉬는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도 책상 앞에 엎드려라도 있어 주는 아이가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남편이 증권투자 잘못해서 있는 재산 반 날리고 아파트 평수 줄여갔다는 친구 말에는, 그 아픈 속을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민생활 10년 동안 한국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뉴지의 우리 집 팔아야 너 사는 아파트 전세 값이나 될랑가 모르겠다.

공기 좋고 물 좋으면 뭐하냐, 느는 게 주근깨랑 주름살이요. 줄어드는 게 돈이요, 늘지 않는 것이 영어 아니냐. 애들 영어? 잘 하면 뭐하냐. 한국말은 어눌하지, 저 푸른 초원의 그림 같은 집들? 다 그림에 떡이더라.

골프? 뉴지에는 널린 게 골프장이라는데, 한국에서 필드 한번 나갈 돈이면 뉴지에선 일년을 칠 수 있다지만, 나는 골프 공이랑 탁구 공이 비스므리하게 생긴 거 밖엔 모른다니까? 에고, 왜 이민을 왔던고….

그러나 밉살스럽게도 자기네 아파트가 학군이 좋아 엊그제 20억이 되었다는 또 다른 친구의 말에는, 20억? 우리 집 이 층에 올라가면 저 멀리 스위스 알프스 산맥보다 더 아름다운 설경이 보이지. 넓은 정원은 가드너가 도와주지 않으면 깎을 엄두를 못낸다니까? 20 억 닭장 같은 아파트에서 올려보고 내려다 봐야 우중충한 잿빛하늘 밖에 더 보이겠냐? 어찌 삶의 질을 감히 비교 할 수 있겄냐. 공기 좋지. 널린 게 푸르디푸른 공원이고 골프장이지, 육각수 수돗물을 그냥 벌컥벌컥 마셔도 되지, 애들 영어 잘하지, 그깟 20억이랑 안 바꾼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자위를 해봐도 20억짜리 아파트 앞에서는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를 않더란 말이지요. 가슴이 쓰리다 못해 이런 노랫말이 절로 떠오르더란 말이지요.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아파트가 20억 되었다고 꼭 그렇게 자랑을 해야 하나?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고 합니다. 누군가 나보다 잘 되었다 하면 괜히 샘 나고 배 아프고 기운 없고, 그러나 나보다 부족하고 덜 잘된 사람들을 보면 내 부족한 것이 넉넉해 보이고 위안을 느낀다고 하니, 가끔은 한숨 나오는 일로 넋두리도 좀 해 보고, 잘 된 일은 호빵처럼 마구 부풀릴 게 아니라 꾹꾹 눌러 호떡만큼이나 납작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인간관계를 때로는 편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맞죠?

이민 초창기 땐 이런 일도 있었더랍니다. 아줌마들끼리 모여서, 그 옛날 한국에서 잘 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를 열심히 하시던 중, 갑자기 머시기 향이 어쩌고 저쩌고 하시는데, 헤이즐럿 향이 말이야~ 아이리쉬 향이 말이야….

그런데 커피라고는 온리, 블랙커피랑 구로3동 커피밖에 모르던 촌스럽던 이 아줌마, 그러나 이제는 키위들이 좋아하는 카푸치노도 알고 라떼도 알고 에스프레소도 알지만, 그땐 분위기 썰렁하게 이렇게 말을 하지 않았겠어요.

“‘헤이즐럿’? 고 거이 어느 화장품회사에서 나오는 향수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