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비긴 어게인 – 에필로그: 다시, 사우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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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에필로그: 다시, 사우다드
서울로 돌아온 지 일 년이 지났다. 버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가 특정하게 기울어질 때, 오후 네 시쯤 건물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 나는 멈춘다. 포르투갈이 불현듯 돌아온다.
어느 화요일 오후, 종로 재동의 작은 카페에서 바리스타가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스팀 밸브를 돌리는 소리가 ‘치익’ 하고 났다. 그 순간 리스본 알파마의 작은 카페가 떠올랐다. 테이블 네 개짜리, 주인 할아버지가 혼자 운영하던 곳. 벽에는 1960년대 파두 가수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았었다. 골목을 지나가는 고양이 한 마리, 빨래를 널던 아주머니, 학교 가는 아이들. 우리는 그 카페에 두 번이나 갔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가 급정거했고, 브레이크 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 순간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리스본의 트램 28번이 그라사 언덕을 오를 때 나던 소리가 비슷했다. 창밖으로 보이던 빨간 지붕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등, 창문에 비친 내 얼굴까지 한꺼번에 떠올랐다.
포르투갈에서 나는 사진보다 소리를 더 많이 기억한다. 오전 7시, 숙소 창문으로 들려오던 트램 레일 소리. 포르투 도루강변에서 불어오던 바람 소리. 히베이라 지구의 빗방울이 돌계단에 떨어지는 소리. 브라가 봉 제수스 계단 중간의 분수 물소리. 밤 10시, 리스본 바이샤의 어느 골목에서 들었던 기타 연습 소리. 시아두 책방에서 점원이 책을 쌓으며 내던 한숨 소리. 그 열이틀의 여정이 이제는 감각으로 남아 있다.
빛도 기억에 남는다. 리스본의 빛은 부드럽고 오래 남는다는 느낌이었다. 오후 6시인데도 해가 높았고, 건물 벽에 닿는 빛이 따뜻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리에 오래 앉아 있었던 것 같다. 포르투의 빛은 더 차갑고 선명했다. 강물에 반사되는 빛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카보 다 호카의 빛은 거칠었다. 바다와 절벽이 만나는 곳의 빛은 다른 어느 곳과도 달랐다. 포르투는 나에게 깊이를 가르쳤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의 가치, 천천히 읽어야 보이는 아름다움, 시간이 쌓아올린 무게. 도루강변을 걷고, 와인 셀러의 묵직한 향을 맡고, 아줄레주 타일의 세월을 만지며, 나는 조급함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리스본은 나에게 생동감을 일깨웠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숨을 헐떡이고, 트램에 매달려 좁은 골목을 지나가고, 알파마에서 길을 잃고, 파두에 취하며, 나는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법을 배웠다.
두 도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서두르지 말라고. 과시하지 말라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돌아올 때 가방에는 별게 없었다. 아줄레주 타일 문양 냉장고 자석 세 개, 코르크 지갑 하나, 포르투의 포트 와인 한 병, 도루 밸리산 레드 와인 두 병, 정어리 통조림 몇 개. 벨렝의 파스텔 데 나타 상자는 공항 세관을 지나면서 먹어버렸다. 우리는 네 명 모두 하나씩 먹었다. 그리고 웃었다.

<알라딘 / 교보문고> [eBook] 포르투, 오래된 시간을 걷다 – PORTUGAL, BEGIN AGAIN
(지은이) 이홍범 2025-09-01

진짜 가져온 건 따로 있다. 테주강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 생각보다 넓었다. 생각보다 조용했다. 포르투 도루강변을 걷던 오후의 바람. 강물 냄새와 와인 셀러의 나무통 냄새가 섞여 있었다. 브라가 봉 제수스 계단의 분수 소리. 카보 다 호카 절벽 위의 거센 바람. 카스카이스 해변 카페에서 본 평화로운 오후.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한 사람들.
사진은 2,000장쯤 찍었다. 정작 자주 보는 건 백 장 정도다. 트램을 기다리다가 찍은 골목 사진—빨래가 널려 있고 고양이 한 마리가 계단에 앉아 있다.
벨렝 탑은 정면보다 옆에서 찍은 사진이 더 좋다. 사람이 없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포르투 렐루서점의 오래된 책 냄새와 나무 바닥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기억해야 그곳이 완성된다.
가장 자주 보는 사진은 네 명이 함께 찍은 것들이다. 상 조르즈 성 전망대에서, 카보 다 호카 절벽에서, 카스카이스 해변에서. 사진을 볼 때마다 그때의 대화가 떠오른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느렸다. 카페 주문도 늦고, 버스도 늦고, 식당 음식도 늦게 나왔다. 처음엔 답답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 그 리듬에 익숙해졌다. 급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광장에 앉아 한없이 수다를 떨었고, 강변에서 해질 때까지 맥주를 마셨고, 카페에서 신문을 읽으며 오후를 보냈다.
포르투갈은 과거를 그대로 둔다. 낡은 건물을 부수지 않고, 오래된 트램을 계속 운행하고, 좁은 골목을 넓히지 않는다.
동시에 새로운 카페가 생기고, 젊은 예술가들이 벽화를 그리고,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싸우지 않고 그냥 같이 있다. 그게 포르투갈이 준 가장 큰 인상이었다. 급하지 않다는 것.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냥 있다는 것.
사우다드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다. 한국어로 정확히 옮길 수 없다고 했다. 그리움과 비슷하지만 다르다고. 현지인은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포르투갈은 이미 지나간 여행이지만,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무언가로 남아 있다.
다시 갈 수는 없지만 완전히 떠나온 것도 아니다. 기억 속에 있지만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 어딘가 사이, 현재와 과거가 겹치는 지점에서 포르투갈은 계속 살아 숨 쉰다. 그게 사우다드인 것 같다.

서울에 돌아와서 나는 여전히 빠르게 움직인다. 지하철을 뛰어가고, 식사를 빨리 하고, 약속 시간에 맞춰 서두른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멈춘다. 카페에 조금 더 앉아 있고, 공원을 조금 더 천천히 걷고, 노을을 조금 더 오래 본다.
트램 소리는 이제 못 듣는다. 바다 냄새도 없다. 타일 골목도 없다. 도루강의 바람도 없다. 하지만 가끔 버스 브레이크 소리를 들으면, 가끔 카페 스팀 소리를 들으면, 가끔 강변을 걸으면, 가끔 이유 없이 그 나라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 덜 급해진다. 조금 더 천천히 걷는다.
조금 더 오래 앉아 있는다. 그게 포르투갈이 남긴 것이다.
리스본을 떠날 때 나는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와서 시간이 지나니까 자꾸 떠올랐다. 가보지 못한 곳도 많았다. 신트라는 페나성 입장권을 예약하지 못해서 못 갔고, 나자레와 라고스 그리고 코임브라는 시간이 되지 않아 아예 계획조차 세우지 못했다.
벨렝에서 먹은 파스텔 데 나타는 줄이 길어서 한 곳만 먹어봤는데, 현지인이 추천한 다른 가게도 가보고 싶다.
그런데 다시 가고 싶은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다. 알파마 골목을 다시 걷고 싶다. 이번엔 지도 없이. 트램 28번을 다시 타고 싶다. 이번엔 앉아서. 포르투의 도루강변을 다시 걷고 싶다. 이번엔 해질 무렵에. 파두 바에 다시 가고 싶다. 이번엔 포르투갈어 가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면서. 알파마 그 방에서, 창문을 열고 테주강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싶다. 렐루서점의 붉은 계단에 다시 서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과 다시 가고 싶다. 같은 곳을 다시 가면서, 달라진 우리를 확인하고 싶다.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 루이스 드 카몽이스
나는 그 경계에 잠시 서 있었다. 땅의 끝에서 바다를 봤다. 그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경계의 감각은 아직 남아 있다. 포르투갈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여행이 끝나도 여정은 계속된다.
언젠가 다시 갈 것이다. 급하지 않게. 준비되었을 때. 그리고 그때는, 이미 갔던 곳을 다시 갈 것이다. 새로운 곳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곳에서 다른 것을 보기 위해서.
그때도 우리는 함께일 것이다.
포르투갈,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끝> [KR]

** 그동안 본지에 한 해 가까이 실렸던 이홍범 작가의 여행기 ‘포르투갈, 비긴 어게인’의 전체 내용은, 현재 한국의 여러 서점과 아마존 등에서 종이책과 eBook으로 출판해 판매 중이다.
또한 포르투갈 여행기에 이어 다음 주부터는 같은 작가의 ‘독일 중남부 소도시 여행기’가 매주 독자를 찾아간다. [KR]


<교보문고 책 소개>
“내가 작아지는 순간, 비로소 무한해지는 세계”
포르투갈의 바람이 건네는, 다시 시작할 용기에 대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대서양과 수백 년을 견뎌낸 돌벽 앞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움켜쥐고 있던 ‘나’라는 중요함이 세상의 끝자락에서는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지. 나 자신이 작다는 것을 인정하는 낮은 마음에서 비로소 진짜 자유는 시작된다.
30여 년간 법무 전문가로 치열하게 살아온 저자는 포르투갈의 낡은 트램과 푸른 아줄레주 타일 사이에서 인생의 ‘비긴 어게인’을 마주한다. 대지진의 폐허 위에 다시 세워진 리스본부터 담담히 오늘을 빚어내는 포르투의 와인 셀러까지, 포르투갈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다시 시작하는 힘’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이 책은 단순한 명소 안내서가 아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길을 잃는 것이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발견이 된다고 말해주는 포르투갈의 바람을 빌려 당신의 일상에 건네는 다정한 응원이다. (발행 일시: 2026년 3월 2일, 쪽수/크기: 352쪽/152X225mm)


<작가 정보>
국내 법과대학과 미국 로스쿨을 졸업한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국내 대기업에서 30여 년간 기업법무 전문가로 활동하며 글로벌 비즈니스 현장을 누볐다.
유학 시절부터 시작된 여행 열정으로 40여 개국을 탐방하며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다. 출장길에서 마주한 세계 곳곳의 풍경과 가족, 지인들과 나눈 소중한 여정을 통해 독창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여행 스타일을 완성했다. 현재는 여행, 문화, 와인, 예술이 어우러진 인생의 새로운 막을 풍요롭게 채워가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그곳에 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