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위 총각, 한국식 술자리에 도가 트다”
나는 크라이스트처치 폴리텍에서 한국어를 배울 때 거기서 만난 한국 친구들과 처음으로 소주를 마셔 본 적이 있다. 소주 냄새도 모르고 맛도 모르던 내 둔감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지금도 눈 앞에 선하다.
지금은 소주의 향과 맛을 제법 가릴 줄도 알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득도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소주가 좋다. 값싸고 편하고 한 병이면 취할 수 있으니 얼마나 경제적인가 말이다. 그에 비하면 맥주는 냄새도 고약하고 욕조 한 통분은 마셔야 성과를 볼 수 있으니 맥주란 녀석은 내 사랑 소주에 견줄 바가 아예 못 된다.
내가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는 대개 랜디(Randy)라는 친구 녀석 때문이다. 저녁에 기숙사 방에서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노라면 녀석이 문을 벌컥 열며, “한 잔 하러 갈래?” 하고 유혹한다. 그러면 사회성 좋은 나는 “그래!” 하고 두말없이 따라 나선다.
우리는 주점가로 내려가면서 아는 친구들을 죄다 불러낸다. 모두가 바쁘다면서 거부할 때는 단 둘이 쓸쓸히(!) 마신 적도 있지만 친구들이 여럿 모이게 되면 게임을 하면서 재미난 한국식 술자리를 즐기곤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과 술자리는 뉴질랜드에서의 그 것과는 정말 다르다. 대부분은 술을 마시면서 ‘007-빵’, ‘병뚜껑 따기’, ‘랜덤 게임’ 등의 게임을 하게 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베스킨라빈스 31’ 게임인데 그 이유는 내 친구 랜디가 혼자 다 틀려 벌주를 독차지하기 때문이다.
랜디는 숫자를 셀 때 십일(11)과 이십일(21)이라고 해야 할 때 꼭 십이(12)와 이십 이(22)라고 말해서 틀리고, 너그럽게 주어지는 벌주로 제일 먼저 취해 버린다. 이 게임에는 반드시 한국어로 숫자를 세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규칙이 있기에 내 한국어 숫자 공부에 지대한 도움이 되었다.
한 번은 라오스 학생인 조(Joe)가 우리 게임에 낀 적이 있다. 전에 소주 마시고 취해 본 적도 없고 그 게임을 해 본 적도 없는 순진 무구한 조는 그 날 저녁에 벌주 몇 잔을 마시고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했던가?
게임에서 졌을 때 벌주를 마시지 않으려면, 춤추기, 노래하기, 돈 빌려오기, 심지어 지정 받은(물론 난생처음 보는) 여자에게 가서 “게임에서 져서 그런데~ 죄송하지만~ 볼에 뽀뽀해도 될까요?” 하고 물어보기 등등의 무안+황당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아마 이미 모두들 눈치를 챘겠지만 이 모든 벌칙들은 극한 상황에 처한 내가 다 한 번씩 수행해 본 임무들이다. 이런 임무 수행하는 걸 ‘천사’ 또는 ‘어두운 밤’이라고 부르는데 내 생각엔 두 번째 표현이 훨씬 일리가 있는 이름인 것 같다.
뉴질랜드에서 파티를 할 때는 친구 집으로 와인 한 병 가지고 가서 간단한 스낵과 함께 마시는 것이 전부인데, 한국식 술자리에서는 안주로 여러 가지 음식을 곁들여 가며 마신다.
난 한국식이 참 마음에 든다. 술 마실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안주는 과일과 여러 가지 감자 요리이다. 뉴질랜드에 계신 엄마 말씀이 내가 한국 가면 아마도 감자를 제일 먹고 싶어할 거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아직도 잘 이해 안 되는 행동이 한가지 있다. 그건 바로 동성끼리 서로 음식을 먹여 주는 것이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과 우정으로 그러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뉴질랜드에서는 사귀는 연인끼리만 하는 행동이므로 내게는 지금도 좀(…) 그렇게 보인다.
연장자에게 술을 받거나 따를 때 한 손을 받치는 것도 내겐 좀 어색하다. 뉴질랜드 식으로 존경을 표시하려면 상대방이 잔을 들고 있게 하지 않고 내가 미리 따라서 잔을 건네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 동아리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보니 새내기들은 선배들 사이를 돌아 다니며 술을 마시는데, 만일 선배 이름을 기억 못하면 한 잔을 더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엄청난 주량에 놀랐고 선배라는 이유로 어린 후배들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한다는 것도 우습기도 하고 좀 슬프기도 했다. 술 권하는 사회의 첫 발을 대학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알 것도 같고.
한국식 주도 배우기는 내게 큰 즐거움이다. 언어 장벽을 극복하고 한국 친구들을 스스럼 없이 사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가족 없는 유학생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고, 서로 다르기만 한 문화적 차이도 자연스레 배우게 된다.
특히 숫자세기에 엄청난 진보를 가져다 준다는 만족감이 대단하다. 뉴질랜드에 돌아가면 멋(?) 모르는(!) 내 키위 친구들에게 모두 전수해 줄 요량으로 데이브는 오늘도 전심을 다해 술자리에서 배움에 정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