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 특집 ]“팬데믹의 원조 ‘스페인 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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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디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지구촌 식구들의 삶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작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중국을 넘어 전 세계로 급속히 퍼지면서 뉴질랜드 역시 전국을 폐쇄하는 전례가 없는 결정까지 내린 상태이다. 
100년 전에도 인류는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큰 고통을 겪었으며 이는 한국과 뉴질랜드 역사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비록 한 세기 전 일이지만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 우리에게 수많은 교훈을 전해주고 있는 ‘스페인 독감’을 소개한다.

<흑사병 이어 인류 최대의 고통을 안겼던 스페인 독감> 
역사상 인류의 생존 자체를 크게 위협했던 ‘전염병’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흑사병(페스트, Peste)’이다.  
그러나 흑사병이 현 인류가 역사 책에서나 읽을 먼 옛날의 기억이라면, 20세기에 출현했으며 얼마 전에도 인류를 공포스럽게 했던 ‘메르스’나 ‘사스’와 같은 바이러스 질병의 선조 격인 ‘스페인 독감’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삶에 자국을 남긴 이른바 ‘팬데믹’의 원조이기도 하다. 
이번 코로나 사태 등 새 인플루엔자라도 나타나면 단골로 언급되는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 대전(1914.7~1918.11) 종반인 1918년 초부터 종전 후인 1919년 말까지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의 변형인 ‘H1N1 바이러스’에 의해 유행했던 독감을 말한다.  
‘스패니시 인플루엔자(Spanish influenza)’라는 영어 이름처럼 흔히 이 전염병이 스페인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지만 최초 발생지는 미국  시카고 인근이다. 
이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조류 독감 종류로 1918년 시카고 인근 농장에서 오리와 같은 조류가 인간 몸에 바이러스를 옮기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새 바이러스는 유럽 전선으로 가려고 5만8000명이나 되는 많은 군인들이 대기 중이던 캔자스주 퍽스턴 기지에서 1918년 3월에 첫 환자가 발생했다. 
이후 바이러스 변종이 나타나면서 3주 만에 기지에서 1100명이 감염되고 짧은 시간에 38명이나 사망했는데, 당시 한 장교가 이전 독감들과는 다르다고 워싱턴에 보고했지만 묵살됐다. 
결국 바이러스를 품은 군인들은 같은 달 미국 동부에서 수송선 25척에 나눠 타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의 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배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한 독감은 전선까지 퍼진 끝에 최초 발생 40일 만에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부상 아닌 독감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마스크와 사회적 격리 필요성 드러나> 
당시 병원에 온 독감 환자들은 얼굴과 귀, 입술이 파랗게 변하며 피를 토하다 며칠 만에 죽었는데 미군들 뿐만 아니라 영국군도 30만명이 감염됐으며 이 중 10%가 사망할 정도였다. 
또한 증상이 없는 채 휴가를 갔던 영국 군인들은 본토 곳곳에 바이러스를 퍼뜨렸는데, 결국 그해 6월 맨체스터에서 첫 환자가 발생하는 등 유행이 시작된 지 단 100일 만에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모두 1억3000만명이 감염되고 20만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태로 진행됐다.  
한편 당시 런던의 한 의사는 간호원들에게 마스크를 반드시 쓰고 한번 사용한 후에는 버리게 하는 등 당시에도 감염 예방을 위해 마스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맨체스터 일원의 공공보건을 총괄하던 의사인 제임스 니븐 역시 전염을 막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모이지 말고 학교와 주일학교는 문을 닫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일반 시민들을 계몽하고자 수 만장의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고 공공장소에는 전염을 막기 위한 생활 수칙이 담긴 수 백장의 벽보를 붙였다. 
지금 같으면 당연한 조치들이었지만 바이러스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당시에 이 같은 파격적인 조치는 관료들을 비롯한 주민 사회로부터 상당한 저항을 초래했다. 
그러나 니븐은 답답해하면서도 이를 밀어붙였으며 의사이면서 동시에 수학도 전공했던 그는 환자 발생지역 통계 등을 활용해 효율적인 방역 작업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면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왜 미국 아닌 ‘스페인 독감’인가?> 
그해 여름 내내 영국과 프랑스, 독일로 번지던 독감은 결국 남유럽 스페인까지 퍼졌으며 초기 감염자들 중 한 명은 당시 스페인 국왕인 알폰소 13세였다.   
1차 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은 언론들이 자유롭게 새 유형의 독감을 보도했으며 마드리드 특파원들은 이를 ‘스페인 독감’이라고 칭했다. 
반면 당시 한창 전쟁을 치르던 영국이나 프랑스는 군대와 국민 사기 저하를 이유로 새 독감에 대한 논의조차 금기시하고 또한 언론 검열을 당연시하던 실정이었다. 
결국 미국 독감이었어야 할 역사적인 독감이 엉뚱한 이름으로 스페인에게만 안 좋은 이미지를 안긴 셈인데, 이런 상황은 ‘코로나 19’에 대해 중국과 미국이 이름이나 발생지를 놓고  갈등을 벌이는 이유를 엿보게 한다.  
또한 중국 정부가 초기에 이를 숨기기에만 급급했다가 결국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사태를 가래로도 못 막는 파국적인 결과를 불러왔다는 점도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편 맹위를 떨치던 독감은 그해 8월부터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 독감의 공포에서 벗어난 군인들이 전장에 투입되면서 연합국이 유리한 국면에 접어든다.  
맨체스터에서도 8월 초부터 확산이 누그러지는 등 유럽에서도 점차 사태가 진정됐는데, 그렇지만 이미 최초 발병 180일째인 1918년 9월까지 미국과 유럽에서는 총 1억5000만명 감염에 사망자가 25만명에 달했다. 
<더 강력해진 변종, 식민지 조선에서도 맹위> 
하지만 진정될 듯했던 독감은  미국 내 군기지에서 전보다 더욱 치명적이고 감염력도 훨씬 강한 또 다른 변종의 모습으로 다시 출현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그해 9월 29일에 또다시 대규모 병력 수송작전에 나서면서 더 큰 비극이 시작됐다.  
당시 병력 9000명이 탄 5만4000톤급 수송선 ‘리바이어던호’를 지휘했던 한 장교의 기록을 보면, 부두에서 승선을 기다리던 군인들이 쓰러졌으며 출항 첫날부터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배들은 정원보다 50%를 더 태웠는데 인간들로 빽빽이 들어찬 배 안은 바이러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최적의 활동 공간이 됐으며, 결국 리바이어던호에서만 백명 가까운 군인들이 프랑스 땅도 밟지 못한 채 단 8일의 짧은 항해 중 사망했으며 2000명은 중태에 빠졌다. 

이번에 일본에서 대규모 환자가 발생하면서 일명 ‘바이러스 배양접시’로 변했던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의 사례는 리바이던호의 역사적 교훈을 무시했던 결과나 다름 없다. 

한편 첫 바이러스가 등장한 후 변종 바이러스까지 나타나면서 첫 발병 이후 210일 만인 그해 10월까지 사망자가 140만명으로 급증했으며, 독감은 드디어 전 세계로 무섭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더욱 기승을 부리던 독감은 결국 발병 240일째인 1918년 11월까지는 전 세계에서 추정되는 사망자만 최소한 천만명 대를 넘기며 전 인류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당시 총독부 통계를 보면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무오년 독감’이라 불린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조선인 인구 1,678만명 중 절반 가까운 742만명(44%)이 감염돼 13만9000명 이상(전체 감염자의 1.87%, 전체인구의 0.83%)이 희생됐으며 특히 홍성과 서산 등 지금의 충남 지방에서 피해가 컸다.  

또한 백범일지를 보면 당시 중국에 망명했던 김구 선생도 ‘상해에 온 후 서반아(스페인) 감기로 20일 동안 치료한 것뿐이다’라는 귀절을 남겨 선생 역시  같은 독감으로 고생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시 미국 정부 의뢰를 받았던 윌리엄 웰츠 박사는 원인을 밝히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폐렴을 일으키는 파이퍼균을 의심했지만 그보다 1000배나 작은 바이러스가 원인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NZ의 어두운 역사와 검역의 교훈 남긴 사모아> 
1918년 11월 11일 드디어 전쟁이 끝났지만 바이러스는 들뜬 기분으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이들이 포옹과 키스로 축하하는 과정을 통해 더욱 무섭게 확산됐다. 
뉴질랜드에는 종전 직전인 1918년 10월 12일, 당시 태평양 정기 여객선인 나이아가라호가 오클랜드에 입항하면서 원하지 않던 바이러스가 유입됐다. 
이로 인해 12월까지 단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무려 9000여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마오리 사망자가 인구에 비해 높은 비율인 2500여명이나 희생됐다. 

이는 지금까지도 뉴질랜드 역사상 전염병으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사망자를 냈던 사건인데, 결국 스페인 독감은 환자 발병 500일째인 1919년 7월까지 전 세계에서 추정 사망자 숫자를 최소 5000만명에서 최대 1억명까지 치솟게 만든 뒤 점차 꼬리를 내렸다.     

이는 백신도 없던 그 시대에 이미 전염될 사람은 모두 전염된 상태에서 면역성을 갖고 살아남았기 때문인데, 역설적으로 바이러스가 가장 강력한 적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면서 세력을 잃은 셈이 됐다. 

이 독감의 사망자 숫자는 책마다 제각각 다른데 이는 전선에서 이미 사망했던 군인 등 많은 사망자들이 독감 사망자로 제대로 집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번 ‘코로나 19’ 사태에서도 우한을 비롯한 세계 전역에서 미처 바이러스 확진도 받기 전에 사망한 사람들 역시 많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한편 당시에도 또 하나 중요한 비교 사례가 발견되는데, 남태평양의 미국령 사모아에서는 사망자가 없었으며 이는 당시 총독인 존 마틴 포이어가 라디오로 소식을 듣자마자 곧 해외 여행객의 입국을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당시 영국 정부의 지시 하에 서 사모아에 주둔하던 뉴질랜드군의 로버트 로간 군정장관은 1918년 11월, 오클랜드에서 출발한 탈룬호의 탑승객들을 제대로 된 검역 절차 없이 상륙시켰다. 그 결과 당시 서 사모아에서는 이들이 상륙한 지 6주 만에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8000명 이상이 죽는 비극이 초래돼 이는 지금도 사모아인들에게는 어두운 역사로 남았다. 지난 2018년에 뉴질랜드 정부는 사건 발생 100주년을 맞이해 사모아 간호사들의 훈련 센터 건립에 200만달러를 지원한 바 있다. 한편 검역의 중요성은 중세 시대의 흑사병 창궐 시대에서도 볼 수 있는데, 14세기 당시 질병이 크게 번진 베니스에서는 동방에서 오는 선박들은 무조건 앞바다의 석호에서 40일간 격리를 시켰다.
현재 공항에서 ‘quarantine’이라 부르는 검역은 이탈리아어로 ‘40’을 뜻하는 ‘quaranta’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당시에도 격리가 전염병 확산 방지에 기여한다는 것을 인식했음을 잘 보여준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는 사회적 격리와 개인 위생, 그리고 검역 등 기초적이고도 교과서적인 대응 만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스페인 독감은 잘 보여주고 있다. [코리아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