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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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바닷가에서 버스를 타는데, 중고등학생 정도의 무리들이 우르르 버스로 몰려온다. 매우 시끌벅적하다. 웃음 소리, 서로 이야기하는 소리 사이에는 간간이 욕도 섞여있다. 버스아저씨가 듣다 못해 욕한 사람은 안 태우겠다고 하고, 아이들은 안 그러겠노라며 자기들끼리 뒷자리에 앉는다. 뭐가 그리 할말이 많은지, 그들은 계속 이야기를 멈출 줄 모른다. 앞자리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그들이 이야기 하는 것들이 뒤섞여 전해진다. 버스 운전사 아저씨와 앞에 있던 승객 한 분이 혀를 차며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다고 하며, ‘요즘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난 승객으로서 그 자리에 앉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물론 아이들이 소란스럽기도 하고, 어른들이 원하는 바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아이들이 조금 더 조용해 주었으면 한건 사실이니까…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나의 어린시절, 그 아저씨들의 어린시절은 어떠했는가?’하는 질문.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소년기에는 또래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인생의 어떤 시절보다 조금 들떠있는 것은 거의 비슷한 것 같다. 그 것은 마치 그 나이 또래의 특징과도 같아서, 함께 있으면 별로 즐겁지 않을 것도 즐겁고, 나쁜 일이든지 좋은 일이든지 함께 하는 용기가 생긴다.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고, 청소년기의 유별난 특성이다. 그런데 한국과 뉴질랜드에서 다 “요즘 젊은 것들은..”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보았다. 이런 것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가보다. 그렇지만 유독 한국은 어른들의 유교적 잣대가 굉장히 심하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우리가 지향하는 ‘옭고 바른’의 틀로 아이들을 잰다. 나 역시 장난꾸러기였던 시절이 있을 법 한데, 그 것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면 마음의 눈살을 찌뿌리게 된다.

나는 공중도덕을 무시하는 청소년들을 옹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종종 한국의 청소년들이 안 되었다고 느낀다. 현대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인성문제가 자주 언급되지만, 그것을 비단 청소년들 본인들로부터 시작된 문제로만 볼 수만은 없다. 맞벌이나 성적을 중요시하는 사회가, 그들에게 예의나 인성보다 더 먼저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 하나하나를 돌보아 줄 수도 없었고, 확실하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도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들도 다 합격할 수 없는 ‘어른들의 잣대’로 그들을 재고는 한다. 혹 우리가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쳐도, 그들은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 있는 청소년들이다. 그렇기에 사회가 그들에게 원하는 것들이, 가끔은 조금 가혹하다고 느껴진다.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들, 경쟁과 질풍노도의 시기 속에서 지쳐가고 메말라가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청소년기에 대한 이해가 정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뉴질랜드 교민으로서 뉴질랜드에서 자라나는 우리의 2세 그리고 유학생 청소년들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나 역시도 청소년기를 졸업한지는 아주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에 항상 다양한 청소년들을 접해 왔었다. 그들이 뉴질랜드에 오기까지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또 와서 겪는 여러가지 고민들도 있다. 이민자는 이민자대로, 유학생은 유학생대로, 2세대던지 1.5세대이던지, 청소년은 청소년이다. 여러 부분에서 지도가 필요한 건 사실이나, 어른들의 섣부른 판단으로 상처받거나 어른들에게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들도 수차례 보았다.

청소년을 나라의 미래 혹은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들을 미래라 생각하고 보살피고, 희망이라 생각하며 대하고 있을까? 나 역시 지금의 청소년들과는 많이 달라 쉽게 “요즘 아이들은……”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 전에 한 번 더 그들이 자라나는 청소년이고, 이 땅의 미래, 희망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본다. 그들은 어른이 아니다.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실수가 많을 수 있는 청소년이다. 우리 모두가 조금만 더 이해의 폭을 넗히고, 청춘들을 사랑으로 대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