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그리고 작별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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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은이는 한국에 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저를 맞이했습니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발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강해 지기만 합니다. 끔찍이도 싫어하는 겨울이지만 이 겨울이 지나가면 노오란 개나리 꽃 피는 한국의 봄을 맞을 수 있다는 희망이 제게 있습니다.

뉴질랜드가 더워질 쯤이면 추운 한국으로 돌아 오고, 그 추위가 한 풀 꺾일 때 즈음이면 또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 오기를 벌써 5년. 짧고도 긴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10일 간의 호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뉴질랜드에서 보낸 마지막 몇 일은 눈 깜짝 할 새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귀국 준비와 이곳 저곳에 인사를 드리느라 참말로 바빴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중요했던 날은 졸업식이였습니다.

대학교 졸업식이라…. 늘 ‘첫째’ 또는 ‘맏이’ 이기만 했던 은이는 대학교 졸업식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덤덤하고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마치 이 여름 방학이 끝나고 나면 내년에도 또 다시 이 대학교로 돌아 와서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12월 16일 졸업식 날. 검은 색 학사모를 쓰고, 졸업 가운을 입으니 현실감이 납니다. 졸업입니다. 12시 30분에 있었던 Art Centre에서부터의 행진은 보슬비로 취소 되었습니다. 3000명에 가까운 졸업생들이 참여하는 정식 졸업식은 4월에 있지만, 유학생들이나 미리 졸업장을 받고 싶은 300명 정도의 학생들을 위해 12월에도 졸업식이 조촐히 진행됩니다.

망토와 모자를 쓴 학교장 선생님과 많은 교수님들, 타운홀에 울려 퍼지는 오르골 소리는 마치 해리 포터 영화를 보는 듯이 웅장하고 근엄했습니다. 뉴질랜드 국가가 울려 퍼지고 졸업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뉴질랜드 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가슴 한가운데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습니다. 은이의 제 2의 고향입니다.

학생 한 사람 한 사람 나가서 졸업장을 받습니다. 제 이름이 불려지고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강단 위로 걸어 나가서 졸업장을 받아 쥡니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합니다. 해내었다는 성취감, 한 가지를 끝내고 난 뒤의 안도감, 3년 동안의 노력을 집약한 한 장의 졸업장에 대한 허무함(?)까지도 말입니다.

고등학교 졸업식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어깨를 눌러 옵니다.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할, 아니 이미 세워져 있었어야 할 시기인 것입니다. 저와 같이 졸업장을 쥔 300명의 친구들 또한 이런 감정과 생각을 하고 있겠죠?

한 교수님의 마무리 멘트가 머리 속에 울려 퍼집니다. 낑낑거리고 산 정상에 올라 와 보니 계곡 너머로 보이는 더 많고, 더 높은 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우리는 이제 하나의 정상 위에 선 것뿐이며 이 것이 끝이 아니라고, 몇 개 너머의 산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격려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었습니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비행기 엔진 소리를 피하려는 생각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습니다. 마침 흘러 나오는 브라함의 다 단조의 심포니 1번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줍니다.

2000년 6월 7일부터 2005년 11월 16일 금요일 오늘 이 시간까지의 길고도 짧았던 근 5년 반에 가까운 유학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철 없던 시절 ‘외국 생활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했던 뉴질랜드의 유학 생활. 문화적, 언어적 쇼크, 부모님, 친구들이 보고 싶어 흘렸던 수 많은 눈물들, 영어가 들리기 시작할 때의 희열, 징그럽도록 많았던 숙제와 시험들. 센티멘탈했던 감성 소녀 은이의 고등학교 시절, 자유롭고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던 대학 시절….

그 동안 만났던 수 많은 사람들. 정말 소중한 인연들. 은이 제가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응원해 주셨고 사랑해 주신 소중한 분들, 인연이 또 닿는다면 장소와 시간의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 꼭 다시 만나 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은이의 유학 일기를 쓴지도 어언 3년.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 그간 스크랩 해 놓은 글들엔 기쁨도 슬픔도 묻어 나는 수 많은 추억들이 있었습니다. 2주에 한 번씩, 다가오는 마감 날짜에 촉박하게 쓸 때가 대부분이 였지만 오늘의 글로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하니 너무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너무도 너무도 많은데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슴 속 한 켠의 소중한 추억의 상자 안에 꼬옥 간직한 채, 은이 여기서 이렇게 작별의 인사를 올립니다. 저물어 가는 2005년 한 해 잘 마무리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다가오는 새해도 희망차게 맞이 하세요. 건강하시고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