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와 받게 된 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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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추석을 먼 이국 땅에서 맞이했습니다. 한국처럼 들뜬 명절 기분을 느낄 수는 없지만, 뉴지의 하늘에 떠 있는 저 둥근 달님이 한국 하늘에도 떠 있겠지 싶어 어떤 분은 눈시울을 붉히며 온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추석 차례를 지낸 후 이웃에 살고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추석 인사를 가자고 하니 아들 녀석이 냉큼 먼저 일어나 두말 없이 따라 나섭니다. 아마 제 딴에는 지난 설날 어른들께 절하고 받았던 세배 돈이 기억나 이번에도 절로 부수입 좀 올릴까 싶어 저리 나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릴 적, 명절이 돌아오면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예쁜 한복을 머리맡에 놓아두고는 빨리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느라 잠을 설치기도 하고, 제사가 빨리 끝나 차례상 위에 놓여 있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기를 고대하며,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과 사촌들과의 만남이 그저 즐겁고 신나기만 했었는데, 어른이 되어 그 모든 일을 뒤치다꺼리 해야 하는 주부 입장이 되고 보니, 이건 즐거운 명절이 아니라 몸살 나는 명절이 되고 맙니다.

명절에 가장 하고픈 일이 뭐냐는 설문조사에, 남자는 고향을 찾고 싶고 여자는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말이 제일 큰 바램이었다고 하니, 편안한 휴식을 바라는 주부들의 마음은 아마도 한국에서는 어쩜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 지도 모릅니다.

이곳에서야 한국 주부들이 느끼는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스트레스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썰렁한 명절이 되겠지만, 그러나 이곳까지 와서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모시는 우리 집은 그러한 스트레스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이번 추석 차례상에는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 평소 좋아하시던 달고 신맛이 나는 홍옥과 비슷한 사과를, 그리고 한국의 크림 빵과 배추 잎으로 부친 부침개에 약간 쓴맛이 나는 그레이프 오렌지, 그리고 시 아버님이 즐기시던 술과 안주, 그리고 시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시느라 많이 드셔보지 못하셨을 갈비와 달콤한 케이크, 그리고 맛있게 빗은 송편을 넉넉히 담아 올려놓고, 아이들이 기억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추석을 맞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저의 바램일 뿐입니다.

차례상 형식에 맞추어 상을 차리다 보니 막상 차례를 지내고 나면 정작 먹지도 않고 놓아두다가 그냥 버리게 되는 음식들도 많고, 그러한 음식들을 장만하기 위해 주부가 애쓰는 일은 정말 힘들기만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차례상에 놓을 음식들을 가격에 맞게 맞춤주문을 하는 일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하니 찬물 한 그릇도 정성이라는 옛 말씀이 무색해 질뿐입니다.

그러니, 제사나 명절 차례상의 형식에 구애 받을 것이 아니라, “나 죽으면, 내 제사상에는 평소 좋아하는 케이크나 하나 올려놓고 나를 기억하는 자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는 어떤 주부의 푸념 섞인 넋두리 말마따나, 조상님들이 평소 좋아하시던 음식 몇 가지만 준비해 가족이 오순도순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며 스트레스 없이 지낼 수 있는 명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은 지나친 바램일까요.

그러나 한 집안의 습관, 관습을 고치는데도 무려 백 년이라는 세월이 걸린다는데, 하물며 몇 백 년을 내려온 민족의 전통과 관습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 일은 63빌딩을 옮겨 놓는 것보다도 힘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 뉴지에 사시는 한국 아줌마들은 이민 와 가장 자유로워진 일 중 하나가 아마도 명절과 관련된 제사, 그리고 일련의 형식적인 인사치레로부터 자유로워 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에서 명절 때마다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생활을 했던 아줌마들이 하나같이 이구동성, 이민 온 우리는 ‘복 받은 녀'(?) 들이라고 말씀들을 하실 정도이니까요.

추석을 맞아 한인회에서 주최한 행사처럼 우리의 아름다운 풍습과 전통을 고수해 나가는 노력은 꼭 필요하지만, 명절 때마다 치러야 하는, 지나치게 형식에 치우친 일들로 인해 온 가족이 즐거워야 할 명절을 주부들에게 짐을 지우는 한숨 나오는 명절로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그리하여 한국에 있는 아줌마들도 모두 스트레스 없는 즐거운 명절을 즐기는 ‘복 받은 녀’ 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