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촌부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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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편집자 책상에 한 통의 원고가 놓여졌다. 이미 이민 10년이 훨씬 넘었다는 한 원로 교민이, 40대 후반에 이민 와 어느덧 회갑을 맞이하면서 인생도 돌아보고 주변에 대한 소회도 적어 놓은 글이었다. 다소 서툴고 직설적인 표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솔직한 마음이 다가와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글쓴이의 요청으로 익명으로 게재한다. (편집자)

알코올 홀릭 : 매일 소주나 와인 몇 병 먹는 사람
카지노 홀릭 : 매일 카지노에서 사는 사람
골프 홀릭 : 주 중 일과가 골프 스케줄로 꽉 차 있는 사람
마이셀프 홀릭 : 남을 위해 시간도 돈도 쓰지 않는 사람
머니 홀릭 : 돈만 보면 홀리거나 속임수를 쓰려는 사람

저는 위의 5가지 유형의 홀릭들을 보고 있자면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본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저는 그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골프 홀릭임을 고백합니다. 저 자신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거의 매일 공을 치다시피 합니다. 겨우 변명이라고 하자면, 오전에는 그나마 아침 근무라도 하고 오후에 골프장에 간다는 핑계를 대지만 그건 솔직히 오전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요즘은, 정말 이러면 안되겠다 하고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틀 정도는 공을 치더라도 하루 정도는 나 자신을 돌보고, 또 남을 도울 수 잇는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말입니다.

아침마다 기도를 드립니다. 마음을 달래며 참회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주변이 아닌 나 자신부터가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모범생이 되어야겠다고 자신을 꼬집어 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불철주야로 살기 위해, 그리고 남을 도우며 노력하는 대다수의 교민 분들을 보면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제 나이 회갑이 되어서, 이렇게 산다고 사실 누가 무어라고 욕하겠나 싶기도 하지만, 옛 성인께서 “하루 일하지 않았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끔거립니다. 이젠 꽤 노년이 아니냐고 변명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마음 한 구석의 찜찜함은 차마 어떻게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청소는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아침 6시에 기상해 청소와 집안 정리, 냉장고 정리와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내 마음까지도 깨끗해지는 것 같습니다. 기도도 마치고 아침 7시에 아내와 함께 수영장에 가니 정말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만추’의 정경이 되살아 납니다.

이제서야 함께 늙어가는 마누라와 오순도순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와 기회가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나름대로는 집안 걱정, 아내 걱정, 자식 걱정을 한다고 하면서도 가게 돌보랴, 공치러 다니랴, 친구들 모임 가지랴 바쁘게만 살다 보니까 요즘 같은 이런 기쁜 시간이 있다는 사실은 차마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젠 누구 앞에서도 크라이스트처치의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전 9시 30분까지는 미소와 화답으로, 서로의 건강과 자식들의 앞날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정서적인 대화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해 겨우 이제서야 실버 인생에 돛을 달고 저 편 언덕에 도달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별하는 연습, 남을 돕는 연습, 이런 것들로 제 인생의 행동 씨앗을 뿌려봅니다. 가게에서 매장도 정리하고 청소도 하면서 은퇴 시기를 앞두고 제 자신을 마지막으로 가늠해 봅니다.

한 주에 4, 5일이던 외식도 줄이려고 노력하며 스카이 TV와 스포츠 방송을 보다가 그도 재미가 없을 땐 아내와 1년짜리 화투를 치기도 합니다. 와인 한 잔을 걸치며 때론 개평을 주기도 또 때론 사정 끝에 몇 푼의 팁을 받기도 하면서 1년 동안 사랑 싸움을 벌입니다.

밤 11시경이면 하루 일과를 반성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 30분 가량 책을 봅니다. 평소에도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 시간 책보기는 달콤한 수면제로, 저를 밤의 나그네로 만듭니다.

요즘 저는 항시 웃는 연습을 합니다. “스마일,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 “나와 남의 말을 좋게 하기”.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웃으면 관상이 달라지고 그러면 운명도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 함께 “Smile & Good Talking”를 합시다.

우리는 이민 2, 3세대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5대 홀릭들이 사라지면서 맑고 건전한 크라이스트처치 교민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크라이스트처치를 사랑하는 필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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