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카이아 계곡에서 찾은 외할머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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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는 포근한 날씨로 봄이 일찍 시작되는지 정원엔 벌써 봄 꽃들이 여기 저기서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선진국일수록 실제 경관과 엽서의 사진이 같고, 후진국일수록 사진과 실제 경치가 많이 다르다고 하니, 마치 미인은 사진에서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이 좋은 나라에 살면서 산이 어찌 생겼는지는 경치로만, 사진으로만 감상을 할 뿐 기껏해야 캐시미어 언덕을 몇 번 올라본 게 다인데, 지난 토요일에는 뉴지 에서는 꽤 유명한 산행 코스인 ‘Rakaia George Track’ 을 가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정말 아름다운, 산행과 산책이 함께 어우러진 환상적인 코스였습니다.

산행 길 내내 가파른 절벽 밑으로 흐르는 긴 에메랄드 빛 강이 우리의 발걸음과 함께 보조를 맞추었습니다.

‘오~ 푸른 바람 불어와 푸른빛 물결 일으킨다네~ 오 온통 푸른 이 목장~’ 노랫말처럼, 저 멀리 마치 달력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목장 위로 눈부신 햇살이 부서지고 바람은 ‘쏴아아~ 쏴아아~’ 바다 소리를 내며 귓전에서 부서졌습니다.

내 어릴 적. 방학 때면 찾아가는 외할머니 댁은 낮은 산허리 중턱에 놓여 있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쪽에는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고 그 대나무 밭 옆, 텃밭 아래 쪽엔 초록의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지요. 초가집 뒤로는 감나무, 밤나무가 서있는 조그만 과수원이 있고 탱자나무로 이루어진 그 과수원 울타리 뒤쪽으로 나지막한 산들이 드리워져 있었으니 참으로 예쁜 풍경이었습니다.

할머니 댁 앞산에 올라서면 들리던 ‘쏴아아~ ‘ 부서지던 소리가 바람 소리인 것도 같고 바다 소리인 것도 같더니, 라카이아 산행 길에서 귓전에 부서지던 ‘쏴아아 ~’ 소리는 잠시나마 저 멀리 외할머니 댁 산으로 달려가게 만들었습니다.

산길을 걷는 내내 발 밑에 수복이 쌓여있던 누런 소나무 갈비는, 갈퀴로 긁어 포대에 담아 정지(부엌)에 수북이 재워두고 군불을 때시던 할머니의 모습, 그 군불에 구워 먹던 군고구마의 맛까지 그립게 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 할 수만 있다면, 산행 길 사방에 널린 그 누런 갈비 긁어 모아 할머니 정지에 가득 채워 드리고 싶은데, 소갈비도 귀하지 않은 요즘 세상을 사는 나와, 소나무 갈비 귀하게 긁어 모으시던 할머니의 그 굵던 손마디가 비교되어 마음이 싸했습니다.

그리 깊지 않은 산 속에는 그 옛날 금을 캐던 금광의 흔적이 음산한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그곳에 금이 묻혀 있는 줄은 어찌 알았을까. 금을 채취하던 광부들의 한숨과 탄성도 저 강물과 흐르는 바람결에 덧없이 흘러가 버렸으리라……

라카이아 고지는 강과 계곡이 깊은 곳이라, 덩치가 산만한 몬스타(괴물)가 날려갈 정도로 바람이 많고 세기로 유명한 산행코스라고 하는데, 그러나 워낙 출중한 주위 경관과 완만한 코스 덕분에 초보자라도 그리 힘들지 않게 산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눈 쌓인 산은 아마도 이 몇 배는 더 힘이 들것이니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만족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아주 조금만 힘들고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 즐거움이 배가 될 터인데, 삶이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니, 누군가가 극복한 힘든 삶이나, 그들이 이루어낸 성공은, 저 멀리 높이 바라다 보이는 눈 쌓인 험한 산을 오르는 어려움과도 같았으려니 잠시 생각을 해 봤습니다.

건강을 위해 산행을 결심하고도 이런 저런 이유로 게으름을 피우곤 합니다만, 백 가지 알고 있는 지식보다 한가지 실천이 중요하다 했는데, 어제도 전화 통화를 하게 된 친구와 이런 음식이 좋다느니 저런 음식이 좋다느니 한참을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그 먹는 거 조차도 아는 것에 비해 단 한가지도 제대로 잘 실천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산행의 즐거움은 역시 정상에 올라 도시락을 꺼내 먹는 즐거움도 한몫을 합니다. 또한 일단 정상에 오르면 더 오르고 싶어도 내려와야만 하고 하산 길엔 등에 맨 가방도 홀쭉해져 가벼워지니, 산행은 참으로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았습니다.

이번 산행은 초보자들을 위한 보너스였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하산을 하는데, 저 아래 강 위엔 모터보트를 타는 사람들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쁘게 달려갑니다.

가슴이 탁 트일 거 같은 보트도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마음먹었을 때 예약이라도 하고 올걸 그랬나…… 그러나 가을 단풍이 들면 더욱 아름답다는 라카이아 고지를 한번 더 다니러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