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최고 조각, 파키스탄라호르박물관의‘단식하는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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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으로 부처의 몸은 서까래가 무너져 집이 허물어지듯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마치 부처의 단식을 직접 옆에서 보고 조각한 것처럼 극사실적이다.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에 소장 중인 간다라 미술의 걸작, 단식하는 부처상(像)을 보고 나는 감동의 전율이 온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오랜 단식 끝에 피골이 상접한 부처의 모습을 어쩌면 저렇게 사실적으로 묘사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수분을 잃어 가지에 잎새 하나 없이 완전히 메말라 버린 겨울 나목(裸木)처럼 부처의 가슴, 어깨, 얼굴은 살 하나 붙어있지 않고 뼈만 남아있고 핏줄만이 툭 불거져 있었다. 오랜 단식 끝에 배가 등가죽에 붙어버린 모습은 보기에도 처참하였다.
인간이 번뇌와 미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식욕, 색욕, 재물욕에 빠져 있기 때문이며 인간의 욕망을 끊어버려야 비로소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극단적인 금식을 선택한 싯다르타.
그는 음식을 줄여가다 나중에는 콩죽 한 방울씩 먹는다. 그러다 결국 그는 죽음 직전에 이른다.
‘단식하는 부처’는 바로 이 상태에 이른 싯다르타의 처절한 단식의 고통을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큼 극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왜 이 작품이 간다라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표현에 딱 맞는 형상이다. 배는 등가죽에 붙어버렸고 살은 수분이 다 빠져나가 뼈만 남았고 핏줄만이 도드라져 있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고 해부학적으로도 일치한다.

그러나 단식으로 죽음 직전에 이른 싯다르타는 그때서야 단식과 같은 극단적인 금욕 수행을 통해서는 해탈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육체를 학대해 가며 욕망을 끊기 위해 수행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집착이며 탐욕인 것을 그는 깨달은 것이다.
극단적인 금욕 수행은 그가 왕자로서의 온갖 호사와 쾌락을 누린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 것이다.
싯다르타는 양극단에 치우쳐서는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으며 바른 생각, 바른 행동을 할 수 없다고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과 인연을 맺으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중시하는 ‘中道(중도)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마을 소녀가 바치는 우유와 쌀죽을 받아 들고 비로소 단식을 풀었다. 이제 그는 싯다르타에서 위대한 불교의 진리인 ‘中道의 길’을 설파하는 깨달은 자 ‘Buddha(붓다)’가 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의 절대 자유와 편안함은 ‘단식하는 부처’의 눈에 잘 나타나있다. 단식으로 눈 두덩이는 깊은 우물처럼 퀭하니 함몰되어 있으나 그 안에 지그시 감은 붓다의 눈은 깨달음을 얻은 자의 여유와 편안함이 흐르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나라를 다녔지만 ‘단식하는 부처’는 내가 본 모든 것과 바꿔도 될 만큼 압도적이었다. 이 하나로 충분했다.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

<글쓴이 조동현은 전북 정읍시에 있는 호남중학교 사회 교사이며 교과서 밖의 생생한 학습자료를 찾아 여행을 다니는 한편 서남저널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자신의 여행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