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큰 두 여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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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생활 할 날도 이제 2달 남짓. 게다가 대학교 3년을 마치는 날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마지막까지 열심히 하는 모습이 절실히 필요할 때인 것 같습니다. 아니, 아직 2달씩이나 남았는데도 마음이 허전하고 싱숭생숭 한 것이 참~ 이상합니다.

기숙사 대청소의 날이었습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썼던 일기장들이 나왔습니다. 4권이나 되는 내 일기장들… 5년이라. 참 긴 시간입니다. 내 조국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나간다는 생각에 마냥 부풀어버린 가슴으로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을 밟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일기장을 들춰 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가 다 컸다고 생각했던 철 없던 고등학교 시절의 일기는 참말로 감수성이 풍부한 제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인생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이 많은지……

헤헤헤~ 다 이렇게 크는 걸까요? 엄마는 시간이 남아 도니까 허튼 생각 따위나 한다고 하셨었죠. 공부나 하라면서 말입니다. 들척이던 일기장에서 흥미 있었던 사건을 하나 발견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다시 하라고 하면 엄두도 못 낼 그런 일 입니다.

4개월 정도 같은 키위 홈스테이에서 살았던, 저보다 2살 어린 한국인 동생과 벌인 일입니다.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내 Bus exchange에서부터 Sumner Beach까지 걸어 가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직도 추운 9월 겨울에 해돋이를 보겠다고 말입니다. 계절이야 그렇다고 쳐도 금요일 밤에 여자애 둘이서 밤길을 걸었다는 것은 조금 무모했던 것 같습니다.(최근 2년 동안 강도나 살인 사건들이 예전보다 빈번히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뉴질랜드도 늘어나는 인구에 따른 범죄율의 증가가 씁쓸할 뿐입니다.)

계획은 이러했습니다. 11.30에 있는 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가서 (금요일이기 때문에 막차가 늦게 까지 있습니다.) 밤 12시에 시내를 도착, 그 때서부터 바다까지 걸어 가는 것입니다. Moore house Ave를 쭈욱~ 타고 걸어 가면 되니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습니다. 무작정 해돋이를 본다는 허접스런 계획에도 아랑곳 않던 두 다리 튼튼한, 두 여자였습니다.

날씨가 꽤 쌀쌀했기에 파카와 장갑, 목도리를 챙기고, 바나나와 초코바와 보온병에 끊는 물을 넣고, 언제 어디서나 한국인과 함께 하는 컵라면도 하나씩 챙겨 넣었습니다. 심야 버스를 타고 시내에 도착했고,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북적대는 시내 중앙을 뒤로 한 채, 저희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몸을 움직이며 걸어서 그런지, 두툼한 파카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웠으면 거추장스러웠지 춥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을 걸었습니다. 두 시간쯤 걸으니까 처음엔 재잘재잘 이야기하던 동생과 저는 최대한 에너지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묵묵히 걸었습니다. 지나가는 차량도 없습니다. 밤의 정적이 저희를 휘감습니다. 다리가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다는 코빼기도 보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Sumner는 차 타고 다닐 때와는 전혀 딴 판으로 너무나 너무나…… 멀었습니다.

새벽 3시가 조금 지날 무렵, 드디어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Sumner 입구일 뿐입니다. 초코바를 먹으며 힘냈습니다. 잠시 쉬는 동안 둘이서 마주 보고 미치도록 웃었습니다. 정말 우리 정신 나간 거 맞다고 말입니다.

밤바다도 정말 조용했습니다. 경적을 울리며 오렌지 색 자동차가 달려 왔습니다. 저희를 보고 소리를 질렀는데 술을 아마 조금은 마신 것이겠죠? 사실 그 때 쪼금~~ 많이 무서웠습니다. 차를 세우고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봐 말이죠. 다행히도 아무 일은 없었지만 말입니다.

4시간 가량 걷자 드디어 발의 핏줄이 서는 듯했습니다. ‘발이 부르튼다’는 말을 실감할 것만 같았습니다. 운동화를 바꾸어서 신어 보았습니다. 도움이 조금 되었습니다.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걸었습니다.

썸너의 Café가 모여 있는 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목표는 언덕에 있는 Scarborough 공원이었습니다. 숨이 턱까지 찼지만 저희는 그 가파를 언덕을 올라 가고야 말았습니다. 공원 의자에서 내려다 보는 Sumner 바닷가와 크라이스트 시내의 야경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컵라면을 꺼내 보온병의 물을 부었습니다. 물은 이미 미지근 해져서 꼬들꼬들한 라면을 먹을 수 밖에 없었지만 정말 맛만 좋더랍니다. 후루룩 라면을 먹다 말고 둘이서 또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말도 안된 계획이지만 이루어 냈다는 승리감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웃긴 걸 어찌합니까?

동쪽 하늘에서부터 서서히 밝아지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게 왠 걸, 저 멀리에 있는 또 다른 언덕이 해돋이 장면을 가릴 듯 합니다. 저쪽 언덕까진 갈 체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젠 해돋이는 어떻게 되도 상관 없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첫차인 듯한 버스를 타고 시내로, 집으로, 그리고 침대로 돌아왔습니다. ‘만용’이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저희는 단지 젊음의 열기를 불살라 보고자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무언가에 도전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너무도 무모했지만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 정말 소중합니다. (하지만 다시 해 볼래? 라고 하신다면.. ㅎㅎㅎ 웬만하면 차로 갑시다. 차로~!)